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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짧은 글] '왕의 DNA'와 우뇌의 신격화

by invrtd.h 2023. 8. 11.

 내일 이산수학 시험인데 왜 또 이런 처참한 사건이 터지는지 모르겠다. 빨리 주절거리고 시험공부 하러 가야겠다.

 

 사이비과학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상식에 최대한 의존하려 한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단어는 '극우뇌'라고 생각한다. '왕의 DNA'라는 표현이 정말 임팩트가 있기는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극우뇌' 이론이 먼저 생겨났고 거기서부터 '왕의 DNA' 같은 표현이 따라나오는 것 같다.

 

 대체 지금이 2023년인데 왜 아직도 사람들은 좌뇌-우뇌 이항대립을 신봉하면서 그걸로 또 굳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가지고 좌뇌를 폄하하고 우뇌를 신봉하는가? 모르겠다. 안아키도 2023년에 존재하는데 뭐... 아무튼 지금 좌뇌-우뇌 이항대립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기가 이 사달을 만들고 있으니 무엇이 이 이데올로기를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지도 살펴봐야겠다. 사실 뜯어보면 결국에는 반지성주의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한다. 사람들은 한국 교육에 막연하게 반감을 느낀다. 한국 교육이 막연히 '좌뇌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좀 더 '우뇌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능이 왜 싫냐고 물어보면 "정답이 하나밖에 없어서"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막연히 "정답이 여러 개 있는 문제"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막상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문제는 대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문제고, "정답이 여러 개 있는 문제"는 대개 의견을 묻는 문제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할 때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문제를 풀면 되고, 의견이 필요할 때는 의견을 묻는 문제를 풀면 된다.

 많은 철학자들이 지금을 탈진실 시대라고 하던데, 옛날에 우뇌를 신봉하는 생각이 그렇게나 퍼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탈진실 시대에 들어설 조짐이 이미 그때부터 보였나 보다. 망할...

 

 아무튼 그딴 건 없다. 좌뇌-우뇌 이항대립은 기능하지 않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미 '좌뇌는 논리, 우뇌는 창의성' 이런 식으로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냈다. 더불어 한국 교육을 무지성 암기 교육이라고 까는 사람들이 많은데, 암기를 통해 얻은 배경지식은 창의성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말고도 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라는 책에 재밌는 내용이 정말 많았다. 예컨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뇌를 스캔해 보면 아이디어가 번뜩이기 한참 전부터 이미 활성화가 시작되고 그걸 인지하는 시점은 그보다 늦다. 그러니까 만화에서 아이디어를 전구가 갑자기 켜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도 환상이고 사실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과정은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갑자기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법 장치라기보다는, 기존 지식을 잘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능력에 가깝다.

 

 아무튼... 결론은 창의성에 대한 숭배가 만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았을지, 그 사실은 종종 무시된다. 그건 심지어 창의성의 끝판왕, 예술을 할 때에 있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레퍼런스를 신봉하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다. 난 대학교의 신문사 디자이너(하꼬 오브 하꼬 오브 하꼬임)였는데 책임디자이너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배운 게 레퍼런스를 중시하는 태도였다. 정말 믿을 게 레퍼런스밖에 없더라. 그런데 그 레퍼런스조차도 사용 가능한 최소한의 지식에 불과하다. 예컨대 [인터스텔라]를 찍기 위해서는 많은 천문학 지식을 쌓아야 하고, 반전을 넣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같은 기법을 사용한 많은 소설/영화를 뒤져봐야 하고, 심지어 결정론/비결정론을 인용했으므로 철학도 좀 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을 파악하는 능력, 지식을 쌓는 능력은 정말로 중요하다.

 

 어쨌든, 처참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손해를 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항상 이런 앙상한 이데올로기에 기대서 희망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들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는 사람이 이득을 본다. 반대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왕의 DNA"를 갖고 있는 그 자신이다. 자식 입장에서 오히려 자신은 타자화될 뿐이다. 그 편지에 '반장 같은 걸 시켜주면 좋다'고 적혀 있었는데 아이 입장에서 정말로 자신이 반장을 하는 것을 원했을까? "왕의 DNA"를 발현시켜야 한다는 부모의 욕심에 짓눌려 아이의 목소리는 오히려 삭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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