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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짧은 글] '야가다사교클럽'은 도둑맞은 가난인가 (아님)

by invrtd.h 2023. 2. 4.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number=1179571 

 

서울대 야가다사교클럽 출범.jpg

web.humoruniv.com

 

 

  야가다사교클럽은 짤에서 볼 수 있다시피 상하차 뛰고 비싼 걸 사먹는 클럽이다. 일단 난 팔로우를 했으니 이 클럽에 가입한 거긴 한데(?) 서울대생이 아니라서 활동을 할 리가 없다. 당연히 장난으로 팔로우한 거다. 짤에 글씨가 작은데 읽어보면

 

 "가장 1차적인 노동인 야가다를 조지고 난 뒤, 서비스 산업의 최고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오마카세를 즐기는, 그 격차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와 low-high (...가려짐) 인문학적 교양, 건강한 육체, 그리고 미식이라는 3가지 요소의 융합을 통해 우리는 다가오는 AI 메타버스 시대 (...가려짐)"

 

 라고 적혀있다. 굳이 자세히 읽을 필요는 없는데, '메타버스' 어쩌고 얘기가 나오는 것부터 모집글이 드립으로 점철된 장난식 모집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글만 장난이고 모집은 진짜 하겠지)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필수적인 생존 요소인 '야가다'를 서울대생들이 반쯤 장난으로 소비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은가?

 

 "도둑맞은 가난"이란 박완서 작가의 동명의 소설에서 나왔던 표현이었다. 소설에서는 여주가 공장에서 남주를 만나 동거하게 되는데, 어느 날 남주가 자신은 사실 부자고 아버지의 지시로 가난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 후 여주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살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몰랐다." 야가다사교클럽의 행위는 얼핏 보면 남주의 행동과 비슷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내부를 잘 들여다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비슷하지는 않다는 게 내 의견이다.

 

 [도둑맞은 가난]에서 부자들이 가난을 "도둑"질하려는 이유에는 100년, 200년 전의 과거에 비해 신분제가 훨씬 '암묵적'으로 변했다는 배경이 깔려있다. 만약 카스트마냥 신분제가 명시적으로 존재했다면 부자들은 전혀 가난을 "도둑"질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낮은 계급과 차별화를 지어야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전부 베블런이 했던 이야기이며, 그에 따르면 이 '차별화'를 짓기 위한 행위가 바로 과시적 소비다. (그냥 명품 사는 거라고 생각하면 됨) 그러나 명시적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돈이 많아 높은 계층에 있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한 가지 요구를 받아야 했다. 어쨌든 명시적으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기 때문에, 자신이 높은 계층에 있다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어디에서든 찾아와야 한다는 요구사항이다. 이에 가장 쉽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도 힘든 시절이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하고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방법이다. 많은 저질 자기계발서들의 흔한 레퍼토리고, 능력만능주의에 기대고 있어 위험하기도 하다. [도둑맞은 가난]에서 여주가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를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남주는 일단 결과부터 만들어 놓고 그 원인을 찾기 위해 가난을 체험하려 했다. 그것이 일종의 기만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훨씬 더 복합적이고 감정적인 이유가 있겠으나, 일단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자.)

 

 야가다사교클럽의 활동 내용은 이런 것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들은 높은 계층에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높은 계층에 있는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야가다를 뛰는 게 아니다. 그냥 오마카세를 먹고 싶어서 야가다를 뛰는 것이다. 나아가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왜 그들은 그냥 오마카세만 먹지 않고 야가다를 뛴 다음 오마카세를 먹는가? 대학생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답변 하나가 있다. '돈이 없어서'. 사실 이것이 많은 대학생의 현실이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높은 계층에 있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서울대를 다니는 학생이면 나중에는 더 높은 계층으로 갈 확률이 높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돈 없는 대학생 신분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 오마카세를 조지는 것은 더 낮은 계층의 아비투스를 향해 내려갔다 다시 본 계층의 아비투스로 돌아오는 과정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더 낮은 계층의 아비투스를 향해 내려간 뒤 자신보다 더 높은 계층의 아비투스를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다.

 

 위의 짤에서 나오는 "그 격차에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라는 문구는 이런 관점으로 읽힐 수 있다. 이 문구가 '야가다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 주의깊게 써지지 못한 문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카타르시스가 낮은 계층의 삶을 비하하는 데서 나오는 카타르시스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들은 배려가 부족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비열하지는 않다.

 

 나아가 나는 이런 활동이 긍정적이라고 본다. 계층론이 등장한 이유는 현대사회가 점점 다원화되면서 계급론의 수직적 단순 2분법/n분법이 더 이상 잘 먹히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계층론에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를 "경제적 지위" "학문적 지위" "문화적 지위" 등으로 나눈다. 학문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라도 경제적 지위는 낮을 수 있다(서울대 대학생 중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많을 것). 이렇듯 점점 다원화되는 한국사회에서 군대라는 장소는 수많은 계층의 사람들을 모두 한곳으로 모아준다는 특이한 역할을 하게 된다. 나는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군대에 간 사람들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다양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된다고 한다. 여하튼, 극도로 다원화되는 한국사회에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다른 계층의 사람들끼리 많이 부딪혀 봐야 한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없다면 대화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장난으로라도 이런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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