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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배추(背秋)]

by invrtd.h 2023. 9. 10.

 그날도 여전히 눈은 눈부시게 오고 바람은 새파라지게 불고, 난 새해가 왔는데도 아직도 헌해를 묻지 못해서, 찌질해보이더라도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뭐 어쩌겠어요.

 

 그리고 내가 망가져있을때면 넌 말하곤 했지-그거 알아 불가능은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래, 그런 널 보고 내 맘은 다시 배춧잎처럼 구겨졌겠지만 넌 역시 그냥저냥하겠지. 난 언제나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비춰주는 투명망토 같은 인간이었으니까(그래, 해리포터의 속마음을 읽는 사람은 많아도 누가 투명망토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겠냐고?), 하지만 뭐 어쩌겠어, 우린 그냥 다른 거야. 내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 넌 아직도 그 토익 문제집을 풀고 있잖아, 배추 세는 듯한 소리를 내며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렇담 너는 관짝에 묻힐 때까지 언제까지나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니? 눈 오는 날에 연인과 헤어지고 나서, 돌아갈 곳 없이 떠돌다, 김치에 소금 뿌리듯이 네 몸이 눈에 절여지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런 때가 정말로 온다면 너도 결국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지우는 인간이 될까? 나한테 자기의 전 여자친구 X X하다고 했던 그 새끼처럼, 아니면 그걸 듣고도 그냥 친구라는 이유로 그래 너만의 사정이 있겠지 하고 넘겼던 나처럼, 네 삶도 고작 프로파간다 하나를 위해 불태우는 삶으로 전락할까?

 

 그해 언젠가부터 나는 매달리듯이 일했고 일했고 일했고, 계절은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온 것 같지도 않았는데 겨울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일했던 건 역설적으로 세상에는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넌 알아주기나 할까. 결국 난 한 해를 바쳐 그런 하찮은 종류의 명제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이 넌 그거 알아 불가능은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래, 하고 말할 거라서, 난 평생을 겨울 속에 살 가을을 저버릴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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