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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상탐

by invrtd.h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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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30분 만에 휘갈기는 것이다(제3회 광주과기원 문학상 – 시 가작)

시는 30분 만에 휘갈기는 것이다 송혜근(소재, 20) 말하자면 시는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 한글을 한 조각 한 조각 깎아내어 유물 캐듯이 시를 쓰는 사람이 있겠지만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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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에는 시가 없습니다. 나중에 면디자인 나오고 지스트신문에 게재되면 바꿈)

제목이 <시는 30분 만에 휘갈기는 것이다>인 이유는 진짜로 저 시를 2022년 4월 26일 새벽에 30분 만에 썼기 때문이다. 내가 보통 시를 쓸 때 2일 정도를 쓰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으로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30분 만에 쓴 시인 연유로, 시 곳곳에서 불친절한 설명과 급진적인 주제 변환이 난무한다. 그래서 사실, 저 시는 절대로 당선작의 범주에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후에 시의 내용을 수정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시는 30분 만에 휘갈기는 것"이라는 주제의식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2 때 교과서에서 "시상은 마치 아이를 품는 것처럼 열 달 동안 가지고 있다가 나와야 한다"는 말을 읽었는데, 그 말을 누가 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지만 시를 쓰던 그 당시에는, 모든 시인이 그렇게 시를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과연 시를 쓴다는 일은 어머니가 된다는 것에 비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인가.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시인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내 친구가 해 준 말로는 한 교수가 시는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숭고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럼 다른 예술을 하는 사람이 슬퍼하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예술을 한다는 게 그렇게 숭고한 일이 맞기는 한 건가. 베블런은 예술은 유한계급의 과시적 욕망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 말에 따르면 예술을 찬양하는 그 많은 말들은 다 헛소리가 된다. 나는 베블런의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베블런이 제기한 문제의식, '예술이 그렇게 숭고한 것이 맞는가?'라는 의식에 대해서는 다들 한 번씩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는 예술을 숭고하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안티테제가 되는 동시에 베블런에 대한 안티테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등장시킨 인물이 "칼을 들이댄 사람"의 앞에서 30분 안에 시를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럴 때 이제 시는 더 이상 삶과 완전히 분리된 무언가로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예술이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1차원적 욕망과 같은 범주에 들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철학의 목표는 세상을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 "말하자면 시는 세상을 뒤엎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선언은 마르크스의 그런 생각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2021년에 내가 쓴 시를 보면 나는 사랑을 굉장히 숭고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2021년 10월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설거지론과 레드필 이론 같은 사이비 이론의 대두는 내게 인간에 대한 실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인간은 애초에 설거지론이나 레드필 이론 같은 사이비 이론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폭력 폭력의 다른 이름은 정의 정의의 다른 이름은 선동"이라는 문장이 시 내부에서 굉장히 뜬금없이 나오는데, 내가 사랑을 폭력적이라고 인식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로 그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사랑은 자기파괴"라는 문장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모습이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간에 "자살하려던 연인을 구출하고"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연인이 자살을 기도했을 때 자책하는 행위도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랑에 실망하여 설거지론이나 레드필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자기파괴적이다.

그 외에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수많은 개인적 경험들이 엮어들어가 있다. 나는 그때 모종의 재수 없는 사건에 걸려서 10명 이상의 친구를 인스타그램에서 차단해 버렸다. 만약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나에게 술을 사준다면 술술 풀어줄 것이다(...). 그 사건도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랑의 자기파괴성'과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A가 B에게 가스라이팅을 가했다고 주장하나 실상 아무것도 없었고 B는 C를 가스라이팅했고... 같은 너무 머리아픈 사건이었다. 다시는 그런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설레는 사랑시'를 쓰던 이전 버전의 송혜근은 바로 2022년 4월 26일 그날 죽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죽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C가 C++로 업그레이드되듯이 수퍼셋이 생겼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사랑은 설렌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다.

많이 부족한 시이고, 작품 컨셉의 특성상 부족한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분한 상을 받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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