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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나

by invrtd.h 2023. 8. 25.

 8월 25일 일기

 카이스트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심하고 나서 주변 사람들한테 "나는 도망치는 거다"라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단 말인가. 사실 별 거 없음. 알고리즘 동아리 터지고 나서 수업을 참여해 봤는데, 음... 내가 무슨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느껴지더라고. 쿠데타 실패한 프리코진의 기분으로 몇 달을 살았음. 그러니까 여러분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꿈을 꾸지 말도록 하시오. 4월쯤인가 이미 카이스트로 가기로 결심함. 그리고 마침 카이스트에 내가 짝사랑하는 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본인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감정 표현을 잘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랩실에 넣어달라는 편지를 준비해 보기로 결심했음. 그리고 열심히 CV를 적었지. 그리고 CV를 적으며 느낀 사실은

 뭐야 생각보다 쩔잖아;;

 하지만 지금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파도 앞에 무너져내리는 한낱 인간일 뿐이므로... 자만심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쉬운 방법 중 하나인데 언젠가 한 번 윤정이에게 했던 말이 생각나네. 세상이 나한테 자만심을 가질 환경을 계속 유도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이럴 때일수록 최선을 다해서 자기객관화를 열심히 해 보자.

 

 아무튼 CV를 적었더니 1페이지 반이 나왔음. 졸업하면 2페이지가 채워지나? 아주 조아요~ 그리고 교수님께 열심히 사랑고백의 편지(??)를 썼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우리 랩실은 원래 학부생 인턴을 받지 않는다는 거였음.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취업이란 홈플러스 주차장에서 끊임없이 빈자리를 찾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한 트윗이 생각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거지. 내가 거절당한 것은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가 틀림없다고. 우리는 알면서도 낚인다. 얼마나 비참한 인생임?

 아무튼 한 번 까였으면 바로 다음 교수님께 문의를 넣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왜일까?? 정답은 바로 버클리에서 너무 피곤했기 때문;; 버클리 하면 생각나는 건 삐까뻔쩍한 건물에 낭만 넘치는 캠퍼스와 그렇지 못한 강의실(의자 간격 개좁음. random access가 불가능하고 double-ended queue처럼 양 옆에서만 접근할 수 있는 하여튼 좁아터졌다), 코딩하기 좋은 카페 스트라다, 축복과도 같은 날씨와 노숙자들, 그리고 이곳이 정말로 세계순위권 컴공인지 의심되는 수준의 이산수학 조교들이 있었다. 이 빡통들은 채점을 겁나 날려서 한다. 아니 맞는 풀이를 적었는데 자꾸 틀렸대;; 그리고 틀린 이유를 찾아보니까 걍 내 풀이가 공식 풀이랑 다른 경우에 지들이 이해를 제대로 못 하는 거임. 예를 들면 이런 케이스가 있었음

 (1) A가 공식 풀이고, 공식 답지에서 B는 이런이런 문제가 있으므로 틀린 풀이라고 적어놓음

 (2) 내 풀이는 B'임. B'은 B 풀이에서 틀린 부분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회해서 맞게 만들어놓은 풀이임

 (3) 조교는 내 풀이를 B로 이해하고 빨간 줄을 그음

 이게 x발 ChatGPT랑 다를 게 뭐냐

 그리고 이렇게 대충 채점할 거면서 또 채점 빠르게 하는 척은 오지게 해요 숙제 분량은 또 겁나 많고 하여튼 보여주기는 오질라게 잘함

 

 그리고 이들은 수학적 귀납법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트리에 관련된 명제 증명할 때 원래 노드를 하나 지운 다음에는 그 노드를 지운 자리에 정확히 갖다붙여야 하는데 걍 노드를 아무데나 갖다붙임;; 내가 조교였으면 너이게이씨 어딜 감히 그냥~ 하고 점수 깠다. 근데 안타까운 사람들은 거기 있었던 한국인 친구들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음. 너무 슬펐다. 방금 CV 찾아보고 깨달은 사실인데

 나도 대학생 수학경시대회 "실버 상" 수상자란 말이야~~

 

 이산수학 A0 받았는데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다. 채점 이슈 다 제껴두고서라도 quiz 1 2 A+ 수준으로 보고 final A0 수준으로 봤는데 원래 나의 빅데이터에 따르면 중간 기말을 모두 A0 수준으로 보면 보통 A+을 받는다. 왜냐하면 통계학 현상 중에 regression to the mean이라는 현상이 있어서 운 좋게 중간에서 A0~A+을 받더라도 실제 실력은 그에 못 미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이 기말 때 B+로 돌아갈 확률이 존재하거든. 이걸 regression to the mean이라고 함. 아무튼 도대체 누가 A+을 받는 거임? 그리고 여기서 나는 final을 왜 조졌는가 하면 때는 기말고사 날... 게을러터진 나는 기말고사 날 6시에 cheat sheet를 인쇄하러 doe library로 갔다... 근데 도서관이 닫혀있었음! 시험 시작은 6시 10분... 걍 조진 거임. 그렇게 cheat sheet 없이 시험을 본 나는 cheat sheet가 없어서 약 5점 정도를 날려먹었다. 5점이면 많이 날려먹은 것도 아니네. 솔직히 말합시다. 전 연속확률분포에 젬병이에요~

 

 게임이론 A0 받았는데 이유를 알겠다. 출석 10번 날려먹어서 그럼

 교수님 내가 한 번 쓰러지니까 나를 위해서 특별히 강의 레코드도 공유해 주셨는데... ㅎㅎ ㅈㅅ ㅋㅋ

 

 아니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까 겁나 나르시시스트 같아 보이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 테스트를 해 봤음

 

 뭐여 진짜 나르시시스트들은 도대체 얼마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인 것이여

 하지만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일부러 나르시시스트가 아닌 척했다면? self-report 검사의 허점을 착실히 이용했다면?? 모를티비

 개소리 그만하고 하려는 얘기에 대해 말하자고

 나는 그날 이후 왜 다른 교수님께 인턴 문의를 넣지 못했나

 안녕하세요 저는 지스트에서 PL(Programming Language)을 하고 있는 송혜근입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정리한 CV를 보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수업에서 Mint Choco 팀으로 활동하다 그만 C++에 재미를 느끼고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라고 왜 하지 못했나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난 2022년 6월부터 지금까지 쭉 억까를 당해 왔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던 거임

 송혜근 인생 역대급 사건 중 하나였던 "그 객지프" 사건도 그중 하나였고

 코로나 빔 처맞음 -> 새내기 시절 인간관계 날아감 -> 1년 질병휴학 -> 신소재였는데 전컴으로 전과 -> 뭐 아는 사람이 없음 -> 사회적으로 도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실존적 위기를 느낌 -> GDSC 야심차게 지원 -> 떨어짐 -> 인간관계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림

 GDSC 떨어지던 그 시절에 난 좀 많이 외로웠었음 그래서 난 이게 정말로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고... 단순히 "내가 지금 지스트 백준 2등인데 날 떨어뜨려?? 기열!!!!" 같은 심정이 아니었음. 난 외로웠기 때문에 발버둥쳤던 거임 솔직히 GDSC 운영진 측 심정?? 이해할 수 있지 내 마음이 찢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운영진도 운영진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 누가 모르겠어. 동아리의 통일성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데

 난 GDSC에 들어가고는 싶었는데 GDSC에 날 맞추는 방법은 몰랐어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GDSC에 날 맞췄다면 어쩌면 PL랩실을 꿈꾸는 지금의 나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날 죽인 다음 덜 외로워지기 vs 날 살리고 외로워지기. 난 죽을 자신이 없었고

 GDSC 지원할 때 디자인 패턴 스터디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이제는 아예 객체지향을 넘어 멀티패러다임을 공부하고 있는데... 어쩌겠니 (그리고 덕분에 디자인패턴 절반 정도 까먹음 ㄲㅂ요)

 

 그래서 인간의 감정에 대해 크게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잘하는 분야에서 실패했을 때의 상처가 내가 못하는 분야에서 실패했을 때의 상처보다 클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님들도 한 번 동아리 말아먹어 보셈)

 왜냐하면 내가 잘하는 분야에서 실패했다면 그만큼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을 테니까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랩실 지원을 무서워했던 거임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패할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더 더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함

 근데... 그렇게 하면 실패했을 때의 상처가 오히려 더 커짐. 이것이 바로 악순환이란 거져

 

 KAIST는 컴공 분야를 기반컴퓨팅과 응용컴퓨팅으로 나누는데(전산학과 공식 홈피에 있음) 지스트는 기반컴퓨팅이 유독 약세임 PL? 컴파일러? 소웨공? 보안? 그런 랩실이 없음... 그래서 난 도망쳤고, 도망친 것까진 좋았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모를티비입니다. 도망치기만 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걸까? 사실 백준 200등 다이아1씩이나 되고 나서 한다는 단어 선택 꼬라지가 '도망친다'인 것도 상당히 웃긴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은 이렇게나 약한 존재인걸! 나는 외로웠고, 사람을 정말로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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