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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카이스트 교환 12-14주차 - 냉장고사회

by invrtd.h 2023. 12. 3.

유년 시절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야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한 철학자 김예원은 한국을 냉장고사회 (Refrigerator Society)로 진단했다. 그 이유는 ㅈㄴ 춥기 때문이다. 요새 나도 한국이 냉장고사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데 패딩을 입지 않으면 얼어 죽을 것 같다는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 하지만 패딩이 없다. 옷 옮길 때 안 예쁘다는 이유로 후순위로 미뤄뒀던 게 이렇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그런 대로 살아야지

오늘의 일기 스타트

Photo by 돌팔이닥터 Shoutout to 돌팔이닥터

 

 11/15 수

 카이스트에서 뭔가를 한다고 했다. 근데 그게 학생들이 부스 운영하고, 푸드트럭 오고, 이런 건 알겠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 안 난다. 

 

 

설영이랑 같이 부스 잠깐 들렀다. 쿠키 장식 만들고 뭐 만들고... 타코야끼 사 먹고... 근데 설영이가 말하길 문어가 별로 안 들었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맛있음'의 역치가 낮은 나는 '옹 그렇구나~' 하면서 그냥 먹었다. 아무래도 난 요리사 같은 건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운명이었던 거야

 

 

그리고 런 intermediate 스터디 끝나고 혼자서 회오리감자를 사서 먹었다. 난 감자에 환장하니까요... 피자의 본고장 미국(? 왜 이탈리아가 아님)에 갔을 때 버클리에서 신나게 피자 시켜 먹던 나는 메뉴판을 보고 "이건 피자가 아니야~~"를 시전했다. 포테이토 피자를 팔지 않았기 때문! 기억하시오 버클리에서는 포테이토 피자를 팔지 않는다

 

11/17 금

 

패플리 MT를 가긴...했는데... 모종의 사유로 고기만 잔뜩 먹고 3시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모종의 사유란 게 뭐냐면... 사실 내 인생은 원래부터 모종의 사유로 가득했는데... 인생이란 게 참 쉽지 않죠 근데 고기 진짜 맛있게 잘 구웠더라... 소시지도...

 

11/22 수

패플리 부회장님이 직접 룩북을 찍어주시는 컨텐츠를 진행합니다. 이전 일기에 "모델 일이 궁금하긴 하다 물론 모델이 될 생각은 없지만;;"이라고 썼던 나는 갑자기 모델 1시간 체험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지 직접 해 보는 게 그 일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귀찮으니 4개만 올림 인서타 가서 보시오

느낀 점:

1. 사람이 이상하게 생겨먹어도 찍는 사람이 잘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온다...

2. 모델은 정말 어렵다. 특히 인간이 내향형이면 더더욱. 하지만 사진 찍는 사람이 원래 모델도 같이 하던 분이셔서 어떤 포즈가 좋은지 이것저것 친절하게 알려주시고 직접 예시까지 보여주셔서 넘 좋았다.

3. 그분은 뭔가 포즈가 뭔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거 보고 경악?하긴 했다. 얼마나 연습해야 저게 되는 거지

4. 예쁜 장소 고르는 법: 카이스트에서 대충 고른다. 말은 대충 고른다고 했어도 평소에 걍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예쁨을 발견하려면 얼마나 섬세한 감각을 가져야 하는가?

 

암튼 카이스트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 만들어주신 돌팔이닥터님 넘 감사드립니다.

혹시 이분이 뭐하는 분인지 궁금하다면 인스타 @doll_party_doctor (사진계), @she_is_jay (모델계) ㄱㄱ

 

11/14 화

Q. 왜 빡대가리같이 시간이 뒤로 가는가?

A. 내맘~

 

 

겨울방학에 동시성 프로그래밍 랩실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겨울방학에 지스트에 없다는 뜻임~ 사실 나 잘 아는 사람이라면 겨울방학에도 지스트에 없을 거라는 건 대충 예측했겠지만

하지만 아직 확정은 아닙니다. 이 랩실은 숙제를 해야 들어갈 수 있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인데요

숙제가 어려움;;

 

솔직히 카이스트 공부 너무 어렵습니다. 조졌습니다. 최적화고 동시성이고 확통이고 나발이고 다 갑자기 난이도가 수직상승하는 느낌입니다. 내가 한 발짝 앞으로 가면 넌 두 발짝 갑니다. 슬슬 '어렵다' 수준을 넘어 '좆됐X' 수준인 것이 몸으로 체감됩니다. 처음에 좀 쉬웠다고 15학점 그대로 가는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후회됩니다. 중간고사 때 그 '쉬운' 난이도로도 얼마나 개고생이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The Way of Spear

 

11/25 토

ICPC 본선에 갔다. ICPC 후기는 다른 글에 따로 서술하기로 했다.

 

https://invrtd-h.tistory.com/145

 

ICPC 2023 본선 후기 (망함)

팀 멤버는 armyantking (P1), invrtd_h (D1), 172635 (P5). 내가 작년에 리저널 28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팀명은 codingMinsu) 올해도 그만큼의 성적을 기대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가장 큰 전력이었던 bbb1293 (D5)

invrtd-h.tistory.com

 

ICPC... 엄청난 낭만의 대회다. 10시에 시작해서 5시간 동안 컴퓨터만 붙들고 문제 풀고 스탭 분들이 점심 도시락 나눠줘도 어차피 문제 풀고 있어서 먹지도 못하는 그런 대회긴 한데... 그래도 며칠 있으면 바람 빠질지도 모를 헬륨 풍선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언제나 기억해.

 

 

11/28 화

신인 래퍼 박예담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카이스트에서 시를 쓰고 있는 래퍼 박예담입니다

 

(얼레벌레 빡통 스물둘인 이유: 만 나이가 한창 이슈였을 때 저 멘트를 썼는데, 뭔가 만 나이 따르는 거 유행 지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만 나이 적극 찬성자기도 하고... 한국인들은 왜 미국인이 야드 파운드 쓰면 비웃으면서 나이는 왜 만 나이로 안 바꾸는가)

 

필명을 지은 이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코딩하는 나와 시 쓰는 나를 분리하겠다는 의미가 가장 컸다. 본캐(?) invrtd.h가 지금 백준 182위 상위 0.16%다. 그러면 사람 생각이 "히힣 난 코딩 잘하니까 앞으로 코딩으로만 먹고살아야지~"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데, 생각해보면 사람이 꼭 코딩만 하거나 시만 쓰거나 둘 중 하나만 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둘 다 해도 된다. 방 청소를 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고 방 청소도 하고 세상도 바꾸면 되는 것처럼 코딩도 하고 시도 쓰고 둘 다 해도 된다는 뜻.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코딩과 시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그냥 필명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시 쓰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하겠지만 본명으로 글을 쓰면 원래 세계의 나한테 묶여서 검열을 하게 된다. 이건 특히 나 같이 빡센 시 쓰는 사람한테 치명적인데... 근데 이건 걍 핑계 같은 게 본명으로도 이상한 시 많이 쓰고 다녔다.

 

Q1: 박예담의 뜻은 무엇일까요?

A1:

 

Q2: 필명은 한 4월쯤부터 짓고 싶었는데 왜 11월 28일에나 지었나요?

A2: 어딘가에 쓸 일이 있었기 때문에

 

 

문뜨 회식 때 먹었던 피자

 

이번 학기 문뜨의 활동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사각사각 뭐하냐 왜 나 활동 못 하기 시작하니까 6월부터 갑자기 시문스터디 확 죽는데요)

내가 제출한 글들만 모아보니까

 

9/5 제19회 무슨 무슨 연예대상 시상식 (줄여서 박은빈)

9/12 어떤(At Dawn)

9/19 Skit-914

9/26 이크! 벌레가 되었어요

10/24 서사중독사회

10/31 재귀함수가 뭔가요?

11/14 빛의 전사 크리퓨어

11/21 금기, 꽃피던 시절의

11/28 뭉탱이월드에 가고 싶다

 

로 굉장히 많이 활동했습니다 (볼드체는 9월 이후에 완성한 신작 글임. Skit-914는 완성만 9월에 했지 3월?쯤에 초안이 나와 있었으나)

 

첨엔 본교 문예창작 동아리랑 학풍이 달라서 어색했던 부분도 있지만... 몬가 자유사상 동아리 같은 열띤 토론이 다른 문학동아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되게 좋았음. 특히 마지막 날에는 <뭉탱이월드>에 대해 즉흥 20분 토론을 했는데, 뭔가 내가 고민하고 있던 주제들을 남들이 같이 생각해 준다는 게 고맙지 않나요? 아님 말구... 정말이지 <뭉탱이월드>에 내가 2023년 2학기 때 했던 고민의 절반은 담겨 있는 것 같음. 하지만 <뭉탱이월드에 가고 싶다> 보지도 못한 사람들은 내가 뭔 얘기 하는지도 모르겠지? 두 번째 시집을 기대해주세요

 

두 번째 시집 얘기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미 [하늘에서 떨어지는 1, 2, ..., R-L+1개의 별]에 실리지 않았으면서 두 번째 시집에 넣을 수 있는 시가 80페이지 넘게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1, 2, ..., R-L+1개의 별]의 볼륨 중 시가 차지하는 분량이 90페이지니까 이미 하려고만 한다면 시집 하나를 충분히 더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보류! 왜냐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활동하던 시절이 문뜨 역사상 가장 찬란한(활동멤버가 많은) 시절이라고 한다. 정말 운 좋게도 난 각사의 전성기와 문뜨의 전성기를 다 누리고 온 셈이다. 난 첨에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서 뭔가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랑 괴리감이 느껴져. 원래 다 그랬거든. 각사 들어갈 때 시가 아니라 소설로 들어갔었고, 진지하게 생각 안 하고 신소재 갔고, 진지하게 생각 안 하고 전컴으로 전과하고... 신기해. 난 옛날에 거대한 뜻이 사람을 바꾸는 줄 알았는데 그냥 스며드는 거였어. 사랑의 시작점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거 읽어본 적은 없는데 2인 대화 형식 에세이라니 장르만으로도 넘 끌리지 않아?

 

그래서 가끔은 너무 과분하게 사랑받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사랑받고 있다는 걸 한번 알아버리면 뭔가 기대에 맞춰 줘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이 생기는데, 난 그만큼의 그릇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난 성향이 좀 독특해서 모두를 다 만족시킬 자신이 없단 말이야. 예컨대 나는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 블로그에서 철학자 한병철(명백히 좌파임)을 엄청나게 까고 정작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칼 포퍼(굳이 분류하면 우파인데 난 그렇게 분류하고 싶지 않음)임 그러면 나한테 어떤 진보주의적 성향을 기대하고 왔다가 내가 한병철 까는 모습(??)에 실망(??)하고 돌아가면 어떻게 되겠어

 

나는 그냥 나인데 사랑받기 시작하는 순간 내가 아니게 된다? 그런 느낌

 

사랑이란 건 맘을 너무 무겁게 하는 주제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무언가/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에 대한 적대자를 상대하는 일이 꼭 한 번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내 시에 "사랑은 폭력" "사랑은 죄" 이런 말이 많이 나오는 걸지도? 싸워야 하니까... 오늘 일기에 룩북 찍은 거 보면 알겠지만 전 옷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근데 어떤 진보꼰대(??) 중에 패션 좋아하는 사람들을 괴물화시켜서 "패션에 매몰된 젊은이들" "자본주의가 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빡통들" 이러는 사람들이 있어요~ 패션 좋아하면 다 명품 좋아하고 패션 좋아하면 다 한 달에 100만 원쯤은 쇼핑몰에 갖다바치는 줄 앎. 그래 놓고는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마음을 공허하게 할 뿐이다" 니들이 뭔데 내 마음이 공허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데요 진심 개빡침. 아무튼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는 거 보면 대충 뭔 소린지 아시겠죠 사랑은 폭력임

 

험난한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날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난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너무 pessimistic하게 생각하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있지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난 잘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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