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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카이스트 교환 7-8주차 - 흐트러지기

by invrtd.h 2023. 10. 22.

안녕하세요 저는 카이스트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INVRTD.H입니다 (my id is case insensitive)
 
카이스트에 온 지 절반이 지나가고 있고, 안타까운 사실은,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슬슬 까먹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난 지스트에서 도망친 게 맞지만, 시인은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도망친 뒤 그 세계를 몰고 지구를 들이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카이스트에서 랩실을 찾든 뭘 하든 아무튼 해야 한다. 사는 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시겠어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씨? 오늘의 일기 스타트

사람에게는 몇 시간의 공부가 필요한가

7-8주차라는 도발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시험기간이었고, 시험기간이란 시험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잼이있어지는 기간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하나가 있는데, 갑자기 해원이가 나한테 부탁을 하나 하길래 (사실 부탁도 아니고 해도되고 안해도된다 수준이엇음)

무려 선대 문제 풀이를 작성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도 11문제씩이나... 진짜 개 웃기지 않음? 공부를 하기 싫어서 도피수단으로 공부를 택하고 있는 모습... 이런 걸 자꾸 경험하다 보면 대체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하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나름 재밌는 면도 있고 할 만한데, 왜 디데이만 정해지면 개 짜증나는 일이 되는 걸까.
 
 하지만 언제나 시험기간을 이렇게 노답 인생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할 일들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10/9 월요일

 

알고리즘 대회를 나갔다
알고리즘 대회란 무엇인가? 5시간 동안 선수들이 열심히 문제를 풀다가 결국 전에 월드파이널 나간 적 있던 팀이 1등을 하고 30만 원을 가져가며 전원이 삼성 소프트웨어 멤버십인 팀이 2등을 하고 20만 원을 가져가는 대회다
나는 친구가 없기에(교환학생이니까 당연하지) 랜덤매칭을 돌렸고, 카이스트에 SSS라는 팀이 있었는데 S 담당 1명이 일정 문제로 빠지고 거기에 내가 꼽사리를 끼게 되었다
나는 INVRTD.H이므로 팀명은 ISS가 되는 것이다
우리 팀은 무려 6등을 했다
6등!!
 
음... 7팀 중에... 6등...
 

 
진짜 경악스러웠던 건 골드가 3개밖에 없는 셋에서 모든 팀이 4솔브를 했다는 것이고
7팀 중 5팀이 Platinum I에 해당하는 G번 문제를 풀었단 거다
미쳤음 진짜
그 와중에 나도 저 당시 퍼포먼스가 역대급으로 좋아서, G번 문제 풀이(P1)랑 L번 문제 풀이(P2)를 내가 냈는데 평소 나라면 절대 낼 수가 없는 퍼포였다. 팀원 분 한 분이 오렌지(상위 1%)고 한 분이 퍼플(상위 4%)이었는데 고작 블딱이가 저 때만큼은 퍼플이랑 비비다니
 
하지만 코드 짜는 건 사람이지만 채점하는 건 하늘이라 했던가... 억까 2개 당해서 4솔브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내가 L 맞췄더라면 5등까진 할 수 있었으려나. 너무 아쉽네
 

10/10 - 10/12 사이 언젠가 (기억 안 남)

시내에 있었는데, 저녁을 먹으러 하염없이 길가를 배회하던 중 두부두루치기라는 정체불명의 메뉴를 만났다
먹어본 결과
나는 사실 두부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이건 정말 두부만 있어서 조금 뇌절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있다
이게 사이드메뉴 같은 거였으면 난 진짜 갈 때마다 시킬 자신 있는데;;
 

아무튼 저걸 먹었고
그 사이에는 별 일 같은 건 없었는데 유튜버 너진똑이 미움받을 용기 까는 영상을 올린 걸 봄
난 아들러 심리학이 이상한 건 줄 알고 있었는데 책 자체가 날조였다니 진짜 충격이다
 

[미움받을 용기]는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2019년) 서울대 자소서에 두 번째로 많이 등장했던 책이었다는 기억이 있다
입사관들은 언젠가 이 영상을 보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책을 미워하더라도, 책을 읽은 사람을 미워하진 말아 주길
원래 세상은 사기꾼들로 넘쳐나는 곳이니까 (취미로 교보문고 같은 데 자주 가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 가끔 사이비 책들이 너무 당당하게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들어가 있다는 걸)
가끔 나랑 비슷한 사람, 그러니까 서점 자주 가는 사람을 보면 난 기도(?)하곤 한다 저 사람은 나처럼 미로에서 헤매지 않게 해 달라고
나도 옛날에 사기꾼들이 쓴 책 많이 읽었음 (대부분은 표지 보고 샀더니 사기꾼이었던 거지만) 지금도 본가 어딘가에 공간을 차지하고 있겠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덜 읽은 사람보다 불행해야 할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 실제로 그렇다는 연구는 없겠지만) 그건 다 사기꾼 저자들 때문일 거야
 

 이런 현수막을 봤는데
 지원할까... 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솔직히 스물두살(만나이사용) 중 나만큼 실패 전문가가 있을까
 포인터 무서워서 신소재로 튄 썰... 나르시시스트(특징:15만원안갚음) 손절하다가 중학교 친구 다 손절해버린 썰... 개노답 썸붕 썰(특징:스케일미쳤음)... 객지프 억까... 알고리즘 동아리 터진 썰... 하여튼 뒤지게 많은데 
 심지어 실패한 이유도 가지가지다. 자기객관화 부족, 시장예측(??) 실패, 2018년부터 이미 돌이킬 수 없게 꼬여있던 친구관계, 지나치게 노력을 많이 함(...), 돈 문제, 건강 문제, 애초에 학교 분위기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랑 안 맞음 등등
 하지만... 100명 정도 되는 청중 앞에서 발표하는 건 솔직히 무서워
 

10/13 금요일

수염 조지기 3회차를 했고, 이번에는 2회차만큼 아팠는데 2회차만큼 다이나믹하게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2회차 땐 진짜 수염 절반이 줄었는데... 이번엔 체감 80%밖에 안 줄었고, 이거 다 복불복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쉑쉑버거를 먹었다

햄버거는 사실 미국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슈퍼두퍼 버거 먹고 싶다. 한 끼에 26,000원을 갈길 수 있는 재력만 나에게 있다면 말이다.
 
이렇게 적어놓으니까 진짜 시험기간에는 시험공부밖에 안 했네
뭔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남한테 얘기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은 슬프지 않겠어
 
그리고 대망의 시험 날이 찾아왔다
 
난 여기 오고 나서, 과연 카이스트 사람들이 지스트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공부를 잘할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하필 듣는 과목이 스펙트럼이 상당히 개판이라 잘 모르겠다
확통 MAS250, 시프 CS230 같은 건 1학년들도 많이 듣는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난 카이스트 1학년 사람들부터 4학년까지 다방면으로 싸우는 것이로군
근데 왜 시프는 지스트 컴시이실보다 어렵습니까? 카이 1학년 ~= 지슷 3학년 인정하는 건가
인정하기 싫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난 지슷사람들이 프로그래밍을 좀더 잘했으면 좋겠음 그래야 더 심화된 내용의 과목이 많이 생길 거 아닙니까
 
지스트에서 들을 수 없는 과목을 카이스트에서 들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확통, 데베 둘 중 하나를 빼고 좀 어려운 과목 하나를 더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내 시간표를 이렇게 정한 것은 학점 인정 이슈 때문이었다
지스트에 이미 있는 과목 3개(확통, 데베, 시프), 교수님께 기초선택 인정되고 전공선택은 회의해봐야 한다고 답장받은 과목 1개(최적화), 걍 내 진로 관련 있어서 들은 과목 1개(동시성)
듣고 싶은 수업의 다양성을 위해 교환학생을 가는 건데 왜 듣고 싶은 걸 맘대로 들을 수가 없는 것인가
슬프다
 

최적화이론 (10/16 월요일)

6문제, 2시간 45분, 1문제에 30분 주는 개극혐시험
하지만 실제로 풀어보면 2시간 45분이 모자름
7점 주는 6(c)를 던지고, 10점 주는 4(b)를 시간이슈로 증명 스케치만 한 채로 냈다
나머지 문제는 다 풀긴 했는데 그럼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최대 85점이라고 치고
어딘가에서 실수했을 것이므로 65~75점 사이 점수를 받는다고 쳐
75점이면 A0 받을 수 있나?
사실 잘 모르겠는 게, 이 과목 듣는 사람들이 수학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감이 별로 없다
그런데 수준이 굉장히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원래 30명이었는데 15명이 드랍해서 15명이 됐기 때문;; 난 분명히 최적화이론 들으면서 과제 채점 결과 보니까 HW1 성적이 내가 평균보다 3점 정도 높길래 "뭐야 카이스트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KLMS를 들어가 보니

이제 평균이 나보다 1.5점 높은 거임
엥? 버그인가?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왜 그런지 깨달았다. 평균을 낮게 받은 사람이 드랍을 하다 보니 하위권이 점점 사라져서 평균이 올라가는 것이다.
이 난관을 invrtd.h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응~~ 끝까지 버티면 그만이야~~
나름 A+을 많이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 경험을 말하자면 기말 잘 보면 보통 성적이 좋게 나온다. 나도 수치로 나타내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명백히 기말 때 배우는 것이 중간 때 배우는 것보다 어려워서 사람들이 조금만 삐끗해도 점수가 나락 가기 쉽기 때문에, 대학 공부는 그냥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승자임! 이 조언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 조언은 끝까지 버티라고만 말할 뿐 어떻게 해야 끝까지 버티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 방법은 알아서 찾도록 하시오. '중간고사 못 봐도 살아날 방법은 있다' 이 정도만 알고 있어도 살 만하겠지 뭐.
 

동시성 프로그래밍 (10/16 월요일)

이거 공부가 좀 빡셌다. 하필 내가 수업 안 들어간 날에만 진도를 많이 나가셨기 때문;; 내 잘못이긴 한데, 추석에 독감급으로 추정되는 감기에 걸렸어서 도저히 수업을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업 빠진 부분을 어떻게든 인터넷 자료만으로 메꾸는데, 확실히 4학년 과목이라 그런지 검색해도 잘 안 나온다. 
 
문제가 재밌었다. '이 정도로 재밌는 문제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교수 하지' 같은 느낌? 근데 그거랑 별개로 평균 높을 것 같아서 걱정된다. 동시성은 내가 잘 본다고 해서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는 과목이 아니다. 타인이 못 봐야 한다(...). 근데 나랑 같이 수업 듣는 사람 중에 HYEA 님이 있다는 것부터 일단 매칭 운은 망했다. 동시성 수업에서 친해진 분이 평균 낮게 잡아도 70 예상하시던데, 나도 채점하면 70 정도 뜰 것 같다. 음...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못하진 않았다. 근데 카이스트 진짜 중에서도 진짜가 모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 같다.
 

가장 빡센 거 두 개 해치우고 난 후 찍은 거

10/17 화요일

사실 이날부터 추위 이슈로 감기가 들기 시작... 아픈 몸이었지만 대충 알아서 버티겠지 라는 마인드로 설영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갔다
그 약속이란 바로 시프 공부를 하는 것인데
시프 시험이 목요일이기 때문에 하루 미룰 수도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안 그러는 편이 나았다 수요일에 더 아팠기 때문에 설영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예 시프 공부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프를 비롯해, 국제정세, 알고리즘 기술 발전의 동향, 심리철학, 경제학, 현대 퍼포먼스 예술, 패션, 지속 가능한 발전, 지스트에서 좋은 랩실 등 훌륭한 얘기를 많이 나눈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주제랑 관련은 없지만 왜 내 갤러리에 있냐 얘는... 여러분은 무엇을 고르시겟습니까

데이터베이스 개론 (10/18 수요일)

내 특징 중에 하나가 스트레스 만땅으로 받으면 실수를 많이 하게 된다는 건데 그날도 그랬다. 환절기 때문에 살짝 감기 걸린 건지 오한 + 두통이 있었고, 거기에 시험기간 자체가 멘탈을 탈탈 털어버리는 중노동이다 보니 컨디션 최악이었고, 쿠팡이츠에서 점심으로 시킨 치킨이 취소되는 걸 보지 못하고, 평일 셔틀 시간표가 아닌 휴일 셔틀 시간표를 봐서 버스를 놓치고, 결국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고, 어찌저찌해서 데이터베이스 시험장에 왔는데 시험 방식이 노답. 인공지능으로 OCR 돌려서 채점하기 때문에 한 번 쓴 답은 두 줄 그어서 수정하지 못하고, 그래서 정답을 다른 데 적었다가 마지막에 옮겨적는 방식이 권장되었지만 나는 시간 단축을 위해 바로 시험지 위에 적는 방식을 택했고, 깨달았다. 나는 답 바꾸기를 생각보다 많이 한다는 사실을. 내가 평소에 과제에서 실수를 잘 안 하는 이유는 타고나서가 아니고, 원래 인간 자체는 실수를 많이 하는 인간이 맞는데 확인을 여러 번 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DB 시험이 끝나고 나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 시험 방식도 내가 가장 취약한 (1줄짜리 문제 + 단답형) 유형의 뭉탱이. 이런 유형의 문제가 적었던 동시성 프로그래밍 시험과 시스템 프로그래밍 시험은 나 자신에게 만족스러울 만큼은 봤다. 이 시험들은 한 문제당 지문이 적어도 10줄은 넘어갈 만큼 길어서 사실 그냥 푸는 것 자체가 재미있었다. 사실 DB 과목 자체가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다. 내가 들었던 컴공 과목 중에 컴프를 제외하고 가장 나랑 안 맞았다. 먼저 드랍한 설영이가 승자가 되는 거지. 내가 잠깐 신소재에 있었을 때는 내가 유기재료화학을 왜 배우는 건지 감이 안 잡혔었는데, 비슷한 감정을 DB 배울 때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나보다 훨씬 많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난 내가 컴퓨터공학을 만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이게 내 과제가 되었다는 건 어쩔 수 없군.
 
가장 문제였던 것은 SQL이라는 언어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배우는 게 너무 재미없었다는 것. 그 한계란

  • 튜링 완전하지 않은 주제에 지원하고 싶은 기능은 ㅈㄴ 많아서 이것저것 다 쑤셔넣음
  • 자연어에 가까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실제로는 유지보수하기 쓰레기 같고, C-like 언어가 더 가독성이 좋다는 사실은 이미 1980년부터 잘 알려졌음
  • 타입 시스템 부재
  • NULL 남용
  • 몰라 그냥 개 그지같단 말이야

하지만 필기를 가장 많이 한 과목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DB다. 어쩔 줄 모르겠어.

확률 및 통계 (10/19 목요일)

쉬움
 

시스템 프로그래밍 (10/19 목요일)

쉬운데 시간압박 심함. 8문제 1시간 40분 시험이지만 페이지 수는 12페이지나 되고, 페이지의 대부분이 어셈블리로 채워져 있다. 결국 한 문제를 버려야 했다.

시험 끝나고 나서

아마 대학교 들어오고 나서 두 번째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시험 주간이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2023년 봄학기 기말인데 그때 나는 외부적인 일로 거의 고장나 있었고, 컴시이실 수업을 6번 연속으로 놓치기도 했다) 근데 그때는 외부요인이 있었으니까 스트레스 자체로만 치면 이번이 원탑이라는 건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로드, 로드로만 따지면 내가 조절을 잘 해 놔서 딱 내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로드를 받았는데, 친한 친구들 다 내버려 두고 거의 혼자서 카이스트 와서 그런가? 
 
확실히 친구는 중요하다. 모든 인간이 어느 날 각각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80억 인류는 2주 내에 몰살당하고도 남는다. 난 수상할 정도로 남들보다 쉽게 상처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할 정도로 이상하고 거대한 사건에 쉽게 휘말렸고, 그럴 때마다 내 편들 아니었으면 난 이미 죽은 목숨 아니었을까? 친구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 - 심리적, 지적, 정치적, 경제적(비금전적인 일이라도)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 은 위기 상황이 아니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난 받은 게 너무 많고, 사실 받은 만큼 그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과연 도리얼 컴프 시험에 멘토?로 참가하는 것이나 선형대수학을 알려주는 것 등은 내가 받은 것에 대한 적절한 갚음이 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솔직히 뭐 때문에 힘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고민을 많이 했지만 무슨 고민을 했는지 자꾸 까먹는다. 다음 고민에 묻혀버린다. 난 그게 인간 사고의 한계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건의 원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도 다시 원인이 존재하고... 이렇게 고민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면 여러 인과관계들이 얽혀 뭉탱이로 존재한다. 사고는 그렇지 않다. 고민을 훑어 가는 우리 언어도, 대화도 모두 한줄서기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결국 표현력의 한계 문제다. 뭉탱이의 표현력은 한줄서기의 표현력보다 크다. 가끔 시 쓰다 보면 글이 1차원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사실 뭐가 문제일지 모르겠다. 한 선배 덕분에 다시는 읽을 것 같지 않았던 [피로사회]를 굳이 다시 찾아서 읽게 됐는데 거기에 "현대사회가 자폐화된다"는 진짜 끔찍한 개소리가 적혀 있어서 이러는 건가? 진짜 뭔 생각임? 하필 이 시점에 내가 신경다양성 관련 연구를 많이 찾아본 탓에 현대사회가 자폐화된다는 말이 얼마나 개소리인지 바로 알 수 있긴 해서 다행이긴 하더라. (최신 연구 중에는 이중 공감 문제라는 것이 있다. 자폐인이 모든 사람과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는 통념을 뒤집고 자폐인-자폐인끼리는 소통이 잘 된다는 걸 발견했으며 그를 통해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공감 체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연구다. 다만 이것이 학계 정설이 될지는 좀 더 지켜보자) 근데 이런 거 다 떠나서라도 "현대사회가 자폐화된다"는 게 사람한테 해도 되는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 이성혐오를 두고 "현대사회가 게이화/레즈화된다"고 말하면 PC 감수성 위반으로 두들겨 맞을 것 같은데? 진짜 자폐인들 아니면 그 주변인들은 이제, 내가 현대사회를 망친 주범이구나 하고 짜져 있으면 되는 건가? 나한테는 자폐를 가진 친척 한 분이 있었는데, 어릴 때 그 사람이랑 싸웠는데 집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내 지퍼를 채워줬었다. 아무 말 없이. 그때 그 사람이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고, 나랑 친해지고 싶구나, 라는 걸 알기에 나는 너무 어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내가 부족한 탓인 것 같다.

https://ko.m.wikipedia.org/wiki/%EC%9D%B4%EC%A4%91_%EA%B3%B5%EA%B0%90_%EB%AC%B8%EC%A0%9C

이중 공감 문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중 공감 문제 자폐증 스펙트럼에 관한 개인에 관한 심리 이론

ko.m.wikipedia.org


 
화를 그만 내기로 했다.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기]에서 말했던 거, 그러니까 분노의 힘을 긍정한다는 선언은 아직도 유효하지만, 그냥 겁나 피곤하다. 정권이 마구잡이로 나중에 내가 받게 될 수도 있는 지원금을 깎더라도 뭐 어쩌겠어, 뭘 할 힘이 남아있지 않는걸. 이 와중에 내 친구에 해당하는 한 블로거가 자신의 서로이웃 글에서 "나는 갓생이라는 말을 안 좋아한다"는 주제의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좀 공격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는데, 사실 남들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임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어쩌고저쩌고..." 그때 생각을 했지. 저게 공격적이면 나는 아무래도 범죄자와 다를 것 없겠군. 만약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면, 나는 그것을 버틸 수 있을까?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 없고. 그가 날 이데올로기에 끼워맞춘다면 나는 그걸 버틸 수 없고, 그가 날 비판한다면 난 말이라도 들어볼 수야 있겠지. 하지만 나는 실제로 옷 좋아하는 애들, SNS 좋아하는 애들 다 빡통 같다는 말(내 식대로 순화함)을 들어봤다. 그것도 같은 20대에게! 그때 쓴 시가 이거
 
분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당한 이유로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내가 부족한 탓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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