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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를 지배하는 생각들

by invrtd.h 2022. 9. 4.

트라이(Trie)의 모습.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이미지 넣을 게 없다.

 

나는 2001년생이기 때문에 20xx년에 xx살이다.

[2016~] 공리(Axiom)주의적 사고. 공리주의라는 말은 정치철학에서도 나오고 수학에서도 나오는데 내가 말하는 것은 후자다. "점은 넓이가 없는 위치이다" 같이 수학의 기초로 쓸 만한 것들을 공리로 정해 놓은 다음,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다. 러프하게 표현하면, "수학은 진리가 아니며 공리들을 갖고 하는 일종의 게임이다"라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당시에는 공리주의적 사고 그 자체보다는 그 '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더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시 말해 명제 논리1차 술어 논리를 배웠다는 뜻. 나는 수학적 증명의 규칙을 꽤 일찍 배웠고, 그 결과 남들의 말에서 형식적 오류를 꽤 잘 찾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 외에도 소설 강의하시는 차미령 교수님께서 내가 굉장히 증명하는 스타일의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다 그때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2016~] 불완전성 정리.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공리계는 그 공리계 내에서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정리. 여기서 증명할 수 없는 명제에는 '그 공리게의 무모순성'이 포함된다. 이걸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이 무모순적임을 증명했으면서 페아노 공리계를 포함하는 공리계는 모두 그 자체로 모순이다'라는 뜻도 되는지라, 이걸 보고 '나는 어디 가서 내가 무모순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8~] 실존주의.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기투되었으나 선택의 연속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 사조. 그리고 그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어린 왕자다. 그런데 사실 이제는 어린 왕자가 어떻게 실존주의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미치겠네. 2019년에 나는 정상인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어떤 도전을 해서 크게 성공시킨다. 그게 실존주의의 영향.

[2020~] 키스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이 책을 읽고 정말 수많은 종류의 인지 오류를 수정했는데 예를 들자면...

  1. 생생함 효과 오류(4장). 기억에서 인출되기 쉬운 정보를 더 중요한 정보로 여기는 오류. 1000개의 데이터를 모은 표보다 하나의 이야기를 더 신뢰하는 것 등의 예시가 있다.
  2. 인과관계-상관관계 혼동 오류(5-6장).
  3. 마법의 탄환 오류(9장). 러프하게 말하면 어떤 결과에 대해 그 원인이 한 가지일 거라고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가정하는 오류.
  4. 베이즈 정리와 관련된 오류(10장). 교정하기 가장 까다롭다.
  5. 민속지혜에 기반한 논증 오류.

특히 이 책에서 앞으로 수 년간 내 인생을 지배하게 될 문장 하나가 튀어나오는데 다음 문장이다.

생각은 값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상황을 잘 설명하는 듯하는 문장(사후적 설명)이 실은 전혀 의미없는 문장일 수 있다는 뜻이다. 스타노비치가 드는 예시로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이 있다. 이 책이 정말 수많은 종류의 인지 오류를 지적하기 때문에, 나는 소위 말하는 '대중심리학'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던 피터슨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게 된 것도 이 책 때문인데, 그의 주장이 대부분 대중심리학에 기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 근데 스타노비치와 피터슨은 같은 대학교의 교수다. 거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심리학의 오해>가 2-3장에서 소개한 매우 중요한 철학자가 있었으니...

[2020~] 포퍼의 반증주의. "A가 과학이다 iff A의 명제들은 반증가능하다"로 정의하는 과학철학 사조. 모 사이비 단체를 빠져나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주장은 반증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2020~]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및 크리스토퍼 놀란, <테넷>. 볼 때 당시에는 몰랐는데 니체 철학에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작품들이더라.

[2021~] 쿤의 패러다임 이론. 나에게 아주 굵직하게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다방면으로 영향을 주었다. "패러다임은 실제로 과학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꾼다"는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22~] 니체 철학. 앞서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선택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니체는 '위버멘시가 되어야 한다'고 답한다. 근데 설명하기 귀찮음.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상은 도덕의 상대성이었는데, 사실 그 당시에 내가 도덕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상태였다. 내 도덕적 특성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도덕적 특성과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선을 한 번 넘어버린 사람들은 절대 용서하지 않고, 그 선의 기준은 굉장히 특이해서 나한테 가한 아무리 나쁜 짓이었더라도 실수였다면 선을 넘은 것으로 치지 않고, 그 사람 본성이었다면 내게 피해가 없더라도 선을 넘은 것으로 치고... 하는 굉장히 복잡한 도덕적 기준이 나한테 있다. 그래서 가끔 '이건 무슨 사이코패스의 도덕적 기준이냐?'라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물론 진짜 사이코패스라는 뜻은 아니고(진짜 사이코패스의 구별은 심리학의 정의를 참조하기 바람) 약간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보여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 어쨌든 니체는 도덕의 상대성을 들면서 사람마다 다른 도덕적 기준이 있을 수 있고,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을 넘어서서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위버멘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힐링이 되는 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2~] 데리다의 해체론. 이해하기가 굉장히 까다롭지만, 이해한 것만 토대로 적어 보자면,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항대립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각종 이데올로기는 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항대립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조. 대표적으로 로고스 중심주의(서구적이고 남성적인 형태의 이성을 인간의 존재 근거로 삼는 사상)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이항대립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중 음성언어는 언제나 좋은 것으로 문자언어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근거가 없다... 뭐 이런 식의 철학임. 아무튼 이항대립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고방식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실제로도 유용하다고 느껴졌다. 최근에 쓴 '우영우 = 판타지 담론의 위험성'이라는 포스트만 봐도...

[2022~] 데리다의 유령론. 담론화되지 못한 약자들이 언젠가 담론화되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들을 환대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우영우 = 판타지 담론의 위험성' 포스트에서 한 번 써먹음. 

근데 이렇게 써 놓으면 내가 데리다를 잘 아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수능 국어 2등급이며 포퍼의 <추측과 논박>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개 털린 전적이 있는 관계로 철학자들 중에서도 난해하기로 유명한 데리다는 도통 읽을 엄두를 못 냈다. 대신 인터넷에 떠도는 글만 주구장창 읽었기 때문에 지식이 굉장히 얕다고 할 수가 있음.

[2022~] 콰인 철학. 데리다의 '차연'이 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없는가에 대해 다룬다면(이렇게 표현하면 꽤 러프한 감이 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마셈),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은 왜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룬다. 그래서 나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이거 말고도 분석명제-종합명제 구분을 파괴한다든지, 철학과 과학 사이에 경계가 없다고 주장한다든지, 미친 짓거리를 많이 했다. 그리고 콰인의 존재론이 ㄹㅇ 아름다운데 그러면 너무 길어져서... 하여튼 내 2022년은 전체적으로 데리다와 콰인 사이의 줄타기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음.

[2022~]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설명하기 귀찮다. 

[2022~]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 엥? 개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부분 관계, 개체 관계, 포함 관계, 인과 관계 등의 온톨로지를 프로그래밍에 접목시킨 것이라 객체 지향 프로그래밍은 논리 훈련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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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을 다 이해해야 나라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까다로운 사람인 데는 다 이유가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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