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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카이스트 교환 4-5주차 - 서랍 속에 넣어둔 꿈 한 조각

by invrtd.h 2023. 9. 27.

 안녕하세요 저는 KAIST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인버트입니다

 지스트라는 안전지대를 떠나 처음 온 카이스트라는 환경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는 개뿔 그냥 대학이잖아!

 다른 곳에서도 같은 것을 공부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권태의 징조일까

 

 이번 주의 일기 시작

 

장영신학생회관 앞

 9/18

 별 일은 없다 하늘이 예뻐서 찍어 보았다

 하늘이 예쁘다

 음...

 버클리의 하늘보다는 덜 예쁘다

 근데 이런 하늘마저도 그렇게 자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한동안 비가 너무 자주 와서 기분이 우울했었다 비구름은 마치 야외에조차도 천장을 규정하는 힘 같다

 마치 잘 만들어진 판옵티콘이다 비 오는 날씨는

 탁 트인 날씨가 좋았다 예쁜 것은 사람을 의존적이게 만든다

 

 닭볶음탕을 먹었다

 사실 닭도리탕이 표준어다

 사실 닭뭉탱탕이 표준어다

 카이스트... 확실히 학교가 커서 메뉴 선택지도 많고 맛있다. 그치만 항상 만족스러운 메뉴가 나오는 건 아니다... 사실 내가 요즘 닭 들어간 메뉴에 환장을 한다. 치킨 찜닭 닭가슴살 상하이치킨버거... 

 

 

 모종의 이유로 내 시집 [하늘에서 떨어지는 1, 2, ..., R-L+1개의 별] 중 내가 갖고 있던 마지막 출판본을 문뜨 동방에 놔두게 되었다

 이유)

 동방에 홀로 남겨져 있던 나... 갑자기 동방에 나타난 의문의 여성에게 시집을 갈취당하고 마는데

 개소리고 그날 처음 만났던 분이 제 시집을 좋아하시길래 빌려드렸습니다

 사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그 책이 내 부적 같은 거긴 하지만 난 어차피 미신을 안 믿어서 상관없음

 아무래도 전 칭찬에 약한가 봐요(??)

 근데 그분이 시집을 저한테 안 돌려주시고 그냥 문뜨 동방에 놔둠;; 그래서 24시간 동안 소유한 점유물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네덜란드 부동산법에 의해 그 시집도 문뜨 소유가 됐습니다 정말 아쉽죠

 

 9/19-9/21

 

 개같이 과제 굴렀던 기억밖에 안 난다

 이 주에 내가 적었던 체크리스트를 잠만 살펴보자면

 이게 뭐시여

 다시 말하지만 나는 최적화이론 동시성 DB 확통 시프 5과목 15학점의 수업을 듣고

 그중 요즘 DB 과목의 과제가 미친듯이 나오고 있다

 (저거 말고도 과제 1개, 랩세션 1개가 더 있음)

 SQL 정도는 CS 하는 인간이라면 필수로 알아둬야 하는 상식 같은 거긴 하지만 너무 귀찮다... 귀찮다...

 

 시프 데이터랩은 이미 한 번 지스트에서 해치운 적이 있는 바... 이틀만에 금방 해치웠다

 

 그리고 동시성

 동.시.성 이 악마같은 수업

내가 쓴 건 아니고 테스트 코드임. 테스트가 틀렸다면 이걸 읽어서 왜 틀렸는지 해석해야 함

 나 진짜 3학년 1학기에 C++로 동시성 약간 미리 공부 안 해 두면 어쩔 뻔했어

 흐에?? 뮤텍스가 뭐죠?? CondVar이 뭐죠?? 스레드 풀이 뭐죠??? 이러고 있었을 거 아냐

 진짜 끔찍하다 선행학습이란 건 고등학교 졸업하면 다시는 안 할 줄 알았지!! 하지만 정작 알게 되는 사실은,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일단 배워놓는 모든 것은 다 선행학습이라는 거였다

 내가 처음엔 생각도 안 했는데 어쩌다 보니 동시성 수업하시는 교수님의 랩실을 준비하게 된 것처럼...

 

 하지만 동시성 프로그래밍 수업에는 반전이 있는데요

 지스트에선 동시성 수업이 전공선택이 아니라 기초선택 인정이 됨

 내가 들은 수업 중에선 컴퓨터 그래픽스와 함께 가장 어려운 수업 중 하나일 텐데도...

 

 하지만 인생은 원래 부조리하며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실존이 부각되는 것이다

 

 9/22

 학교에서 정체불명의 뭐시깽이를 발견했다

 

 레이저 제모 2회차를 받았다

 1회차 때는 역시 처음이라 봐주는 게 맞았다 2회차 때는 레이저 기계 강도를 개 쎄게 해서 내 모근을 조져댔다

 참고로 이 시술의 원리는 레이저가 피부를 통과할 때 다른 색은 그 레이저를 흡수하지 않지만 모근의 색인 검은색만 그 레이저를 흡수하는 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따라서 칼로 사람을 조질 때 고통이 외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과 달리, 나는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고통을 느꼈으며 이것은 흡사 짝사랑하는 사람이 남친이 생겼을 때 내부에서 시작되는 고통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실연보단 덜 아프니 넘 쫄 필요는 없다

 

 아픈 건 1분 남짓이지만

 지금 수염 자라는 속도가 2회차 시술 전에 비해 약 1/2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체감하고 있는데 여기서 오는 만족감은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주의 전통에 따라 잠깐의 고통을 이겨내고 다들 레이저 제모를 받고 반영구적인 행복을 느끼길 바란다

 

 하지만 아직 면도는 하루에 한 번씩 해야 한다

 내가 2020년에 옅게 화장하고 다녔던 이유가(2021.10부터는 귀찮아서 안 함) 수염자국을 가리기 위해서였을 정도로 면도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걸 생각해보면...

 3회차 시술을 빨리 받고 싶은데, 그러려면 또 3주를 기다려야 한다 슬프다

 

 수염을 불태우고 난 뒤엔 교보문고를 갔다

 읽고 싶었던 책 2개를 사진 찍었다. 하나는 디자인 관련 책이었다. 사실 난 '일상에서의 디자인' 같은 데에 되게 흥미가 많다. 신문사에 독자기고 넣으려고 아껴 둔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도 "디자인은 도처에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예쁜 것에 관심만 있지 직접 예쁜 것을 만드는 능력이나 지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아직까지는 아껴두고만 있다. 우리는 미술관에 걸려 있는 그림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스트 도서관이나 카이스트 도서관 같은 것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런 것도 다 예술 작품 아닐까? 우리가 자주 입는 옷은 다 미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설계한 것이다. 예술 작품 아닐까? 그게 복제가 많이 되어서 예술 작품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 다분히 벤야민스러운 생각이다. 근데 invrtd.h 씨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해제 언제 읽을 거임? 맨날 동시성 프로그래밍 과제 이런 것만 하지 말고 책을 좀 읽어야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책을 강제로 읽게 시키는 교양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는 늘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 ppt를 만들 때, 하다못해 셀카를 찍기 위해 배경을 어떻게 할지 생각할 때도

 그래서 내가 한병철이 셀카가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했을 때 좀 빡쳤음

 우리는 예술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젭라 사진 찍는 사람들의 심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야부리 좀 털지 마셈

 인스타감성도 마찬가지임. 2010년대쯤에 '오글거린다'는 말이 유행이 된 이후로 2000년대의 싸이월드 감성은 지워지고야 말았는데... 그 때의 '예술적' 감성 중 일부가 인스타감성에서 부활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이 주장에 일부분 동의한다. 아무튼 예술은 모두의 것이어야만 함 (반박시 신자유주의자)

 

 9/24

 

 멋진 사람과 함께 부대찌개를 먹었다

 이후에는 같이 카공도 했다

 근데 사진이 없다. 부대찌개... 정말 맛있었는데... 빡통인가

 

 엉클부대찌개를 아세??

 

 그리고 4시쯤에 패플리 동아리에서 룩북을 찍기로 했다

 아니 invrtd.h 씨 셀카를 찍다니... 어떻게 그렇게 나르시시즘적인 행위를 눈 깜박 안하고 할 수가 있는 거임?

 하지만 어쩌겠어 찍어오랬는걸... 근데 들어가자마자 바로 룩북 찍어 오라고 해서 좀 어지럽네~라고 생각하긴 했어

 

 B컷을 하나 올려드림 (ㄹㅇ 망가진 컷임 이거 포즈 어정쩡하게 나와서 넘 웃겼음)

 9/25-9/26

 

 오랜만에 코포를 쳤고... 망했다ㅠㅠㅠ 명색이 다이아1씩이나 된다는 사람이 민트 퍼포를 내며 점수 7점 하락함 (설명: 맨날 A+ 맞는 사람이 갑자기 B0 맞는 수준의 충격이라고 보십쇼)

 문제가 좀 개같이 나오긴 했어요 인정하십니까? DP인 줄 알고 1시간 때려박았는데 인풋을 안 읽어도 되는 수준의 애드혹이었음 진짜 개빡치네

 

동방에 이게 있는 이유를 말해봐요

 

 9/26일에 문뜨에 제출한 시 [이크, 벌레가 되었어요!]는 이번 주의 작품으로 선정되어(2등임) 문뜨 계정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왕!

 사실 사각사각 때부터 투표 제도에 반대하긴 했으나, 문뜨에서는 원래부터 있었던 제도니(인스타 운영하려면 어쩔 수 없기도 하고) 걍 따랐고, 막상 선정되니 나름 기분이 괜찮군요

 

 문뜨 사람들이 사각사각이 더 잘하냐고 문뜨가 더 잘하냐고 계속 물어보던데...

 솔직한 의견으로는, 시는 사각사각이 더 잘 쓰고 평론(해석)은 문뜨가 더 잘합니다

 역시 1986년부터 존재한 동아리의 짬밥은 이길 수가 없는 것인가 확실히 글 읽어내는 센스가 좀 있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문뜨에는 대학원생 분들도 좀 계셔서, 평론 더 잘하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듯?

 

 한편 사각사각 9/23 중간마감에는 사랑시 [Skit-914]를 제출했는데 현재는 사각사각 사람들 외에게는 잠깐 숨겨 둔 상태입니다

 이유) 최종병기를 함부로 꺼내면 안 됨

 

 여태까지 시집 [하늘에서 떨어지는 1, 2, ..., R-L+1개의 별]을 여러 사람들이 읽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평가는

 세상을 다 갈아엎자고 하는 게 좋았어요

 였다 근데 난 "아니 난 세상을 갈아엎고 싶지 않아요~~" 하면서 얼버무리긴 했는데

 내 생각이 진짜 그게 맞았을까?

 사실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내 시를 정확히 독해한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사회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필터 때문에 나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례로, 인터넷 밈의 적극적인 활용은 내 시의 특징 중 하나고, 특히 심영물이나 케인물의 주제의식과 기법이 내 시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한 평론에서는 심영물의 폭★8을 "극단적인 두 개의 대립항이 허무라고 폭로되고, 그것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라 묘사한다 이 평론은 비슷하게 내가 어린이 시절 유행하던 플래시 애니메이션, 장땡의 [판타지개그] 역시 허무주의의 미학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고, 평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이런 허무주의는 케인물의 변화구 감성과도 잘 맞닿아 있다 (어떤(At Dawn)은 케인물의 변화구 플롯을 시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 중 하나였고 실제로도 5번씩이나 변화구를 던진다)

 아무튼 이런 플롯이 내 시에서 적극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곧 내가 허무주의와 그로부터 튀어나오는 폭발, 방향성 없는 힘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난 내가 앞으로 평생 컴퓨터공학만 하고, 다른 취미는 없을 사람인 것마냥 굴었다

 그래서 내가 쓴 시를 동아리원 바깥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검열을 내려놓고 나니 진짜로 보였던 건 사회비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나였다

 그건 마치 일 년 전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꿈 한 조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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